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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와 간호사: 한국 경제 발전의 숨은 영웅들

by pabal3 202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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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며, 그들의 헌신과 노력이 한국의 '한강의 기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봅니다.

 

파독광부의 꿈 책 소개 사진
@네이버 도서 캡쳐

 

파독의 시작과 배경

1963년 12월 21일, 한국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이날 123명의 한국 광부들이 서독(西獨)으로 떠나는 첫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이는 파독(派獨)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독일은 노동력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나라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파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광부들의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8,000km나 떨어진 낯선 땅에서 그들은 지하 1km 깊이의 탄광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해야 했습니다. 뜨거운 공기와 무거운 장비, 그리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글뤽 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라는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간호사들 역시 힘든 여정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청소와 간병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야 했고, 언어 장벽으로 인한 어려움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독일 의료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한국 간호사들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독의 규모와 영향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약 8,000명의 광부와 1만 2,000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으로 보낸 송금액은 당시 한국 연간 총 수출의 2%에 육박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이는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한국 정부는 파독 근로자 파견을 담보로 독일 정부로부터 1억 5,900만 마르크의 차관을 받았습니다. 이 자금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파독 근로자들의 삶과 기억

현재 많은 파독 근로자들은 70-80대가 되었습니다.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일부는 독일에 정착했습니다. 경남 남해의 독일마을은 파독 근로자들의 정착을 위해 조성된 곳으로, 현재도 20여 명의 파독 근로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힘들었던 시간들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조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파독 간호사는 "정말 자기 먹는 것 외에는 다 한국에 돈을 부쳤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국에 많은 도움을 줬을 거예요."라고 회상합니다.

 

 

파독의 의의와 현재

파독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파독 광부들의 구술집을 발간하여 그들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는 한국의 이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분의 땀과 헌신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었고, 여러분의 삶이 곧 우리나라의 현대사였습니다."라고 말하며 파독 근로자들의 공헌을 인정했습니다.

 

파독 근로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성공의 기반이 되었고, 우리에게 희생과 인내의 가치를 가르쳐줍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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